홍으로
 
 루브르 + 중세 파리산책  
투어요일
매주 월, 수, 금요일
투어코스
샹제리제(개선문)-루브르 박물관-시테섬(노틀담 성당, 최고재판소, 콩시에르 쥬리)-파리시청-퐁피두센터-샤이오궁전(에펠탑)
(박물관은 예약관계로 오후에 입장할 수 있으며 원활한 진행을 위해 투어일정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예약방법
1)숙박문의시 투어도 함께 문의해주세요
2)유럽산책 홈페이지세서 문의 및 투어 예약가능:www.walking-europe.com
3)카카오톡으로 문의/예약시 친구 등록:82jeanpark

투어요금
* 정상가:
  26세미만:40,000원(현지지불시 28유로) / 26세이상 : 50,000원(현지지불시33유로)
* 민박투숙 고객 특별할인요금:
  26세미만:35,000원(현지지불시 25유로) / 26세이상:40:000원(현지지불시 30유로)
  (취학아동은 동일요금 적용,미취학 아동은 한명에 한해서 무료)
* 민박발행 쿠폰 소지자 투숙고객과 동일대우:
- 한가람 쿠폰을 받아서 예약하고자 할 경우 유럽산책 페이지(www.walking-europe.com)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예약확인 메뉴에서 민박 쿠폰으로 예약한다고 알려주시고 예약하시면 됩니다. 이 경우는 투어 당일 가이드 분에게 반드시 다운받은 쿠폰을 제출 또는 스마트폰으로 다운받으셔서 가이드분에게 확인시켜주시면 됩니다.
(루브르 박물관 예약관계로 인터넷 또는 유,무선 전화 예약필수!!)
- 민박 발행 투어할인쿠폰 받으러 가기
집결지
09:00메트로 1,2,6호선 Charles de Gaulle Etoile(개선문)역 2번출구(Av de Friedland방면)로 나오셔서 오른쪽에 있는 버스정류장 앞!!
포함내용
전문가이드비용, 루브르 예약 및 로컬가이드비용, 수신기 대여비용
불포함내용
-박물관 입장료:11유로(2011년 7월부터 박물관 법이 변경되어 단체 입장시 박물관 패스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박물관 패스 소지자는 가능하면 투어 다음날부터 패스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교통비(하루교통이용권:모빌리스카드 1~2죤:6.6유로) / 개인식사비용/기타 개인경비
참고사항
▣ 참고사항
- 박물관은 예약관계로 오후에 입장할 수 있으며,원활한 투어를 위하여 일정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산책요점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작 !!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승리의 여신상, 나폴레옹 황제대관식 등 다수의 작품을 시대별로(그리스로마시대 조각품-르네상스회화-신고전주의-낭만주의) 관람하시며, 전문가이드의 설명과 비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섬(노틀담성당,콩시에르쥐리,최고재판소 등)』을 비롯해 파리의 아름다운 여러 명소를 전문가이드의 역사적 배경설명과 함께합니다.

* 루브르박물관
영화 <다 빈치 코드>의 무대가 되어 더욱 유명해진 루브르박물관은 박물관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꼭 한번은 들러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개관 이래 프랑스 미술의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 전 세계의 미술가나 미술 연구가 및 애호가들이 수없이 찾아들어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있다. 꼭 봐야할 작품으로는 밀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식, 사모트라케의 니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여신,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등이다.

* 노틀담성당
유럽 최고의 고딕 양식의 결정체라고 칭송 받는 노틀담사원은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1163년 모리스 드 쉴리 파리 주교에 의하여 건축되기 시작하여 약 3세기에 걸쳐 완공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성당 모습은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인 『Notre-Dame de Paris』가 1813년 출판되고 전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후에 많은 지식인들을 자극시켜 복원 공사를 진행한 후에 완성된 모습이다.



* 몽마르뜨언덕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고도 129m의 언덕으로 파리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또한 근대미술의 발달을 촉진한 예술가들이 살았던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고흐, 로트레크를  비롯한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인상파, 상징파, 입체파 등의 발상지를 이루었으며, 언덕 위에 세워진 사크레쾨르 대성당(1910년 완성)은 순례지로서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있으며, 또 유서 깊은 저택과 물랭루주 등의 카바레가 있다. 그 외에도 옛집이 늘어선 거리는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아직도 화가들이 많이 찾아든다.

* 테르트르광장
『언덕의 꼭대기』를 뜻하는 테르트르 광장은 몽마르뜨 주변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광장으로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광장 모습은 바둑판처럼 생겼고, 그리 크지는 않지만, 국내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무명화가들이 밀집해 있는 광장으로 유명하다.

* 개선문
프랑스 파리의 드골(에투알) 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지휘하는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되었으며,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개선문위의 전망대에서는 샹제리제 거리와 라데팡스, 에펠탑 등 파리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 샹제리제거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개선문이 있는 드골광장에 이르는 약2km의 직선도로로, 도로의 양쪽에는 마로니에, 플라타너스 등의 가로수가 울창하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궁을 비롯하여 항공, 해운회사, 자동차 전시장, 고급 의상실 등의 건물이 많다.

◆ 루브르 박물관 개요.


규모
건축면적: 150,000 m2
전시면적: 82,500 m2 (총 전시길이 : 20 Km)
연면적 : 162,250 m2
수장규모: 전체 유물수는 40만점 이며 이중 10만점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설립배경
루브르 미술관 건물은 12세기말에 필립 오귀스뜨 왕이 이곳에 요새를 지으면서 건축이 시작되어 왕궁으로 쓰이게 된 이후 수백년에 걸쳐 여러 왕조가 건물을 확장해 지금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요새로 나중에는 궁전으로 쓰이던 루브르가 최초로 박물관이 된 것은 1793년 파리 생활에 실증이 난 루이 16세가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거처를 옮긴 뒤였다. 초기에는 왕실이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로서의 미술 전시관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없이 많은 예술품을 매입, 약탈 등으로 대규모 미술관으로서의 루브르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0년대 그랑 루브르 라는 프로젝트 아래 2000년을 대비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새로이 정립하기 시작하여 건축물의 원형을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유리피라미드를 세워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놀라운 미적 실험을 감행, 현재 루브르 미술관의 출입구로 사용되는 이 유리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eoh Ming .Pei가 설계한 걸작으로 1988년 완공된 이후 루브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기존의 루브르와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 밀로의 비너스
1820년 그리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밀로의 비너스라고 한다.
비너스의 역사를 통해 여성의 역사를 읽는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문화가 발전해도 여성관만은 모순에 가득 차 있다. 남성적인 시선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물신화 되어온 대표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미의 여신 '비너스'다. 비너스라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먼저 '밀로의 비너스'를 떠올린다. 스타킹, 속옷, 미장원 광고 등을 통해 마치 미인의 전형인 양 우리의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비너스는 서양의 미인 컨테스트 심사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여성의 원조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눈에 비친 이 비너스는, 성스러운 미의 상징이었을 거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육체적 욕망'의 화신이었다. 현명하고 인간 중심적이던 그리스인들은 비너스의 육체에 수학적인 질서의 황금비율을 적용함으로써 실제 인간의 살덩이를 초월한 영원하고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탄력있는 몸매, 사과모양의 가슴에 허리 대 엉덩이의 비율이 0.7이라고 하니, 결론적으로 체중에 관계없이 허리와 히프의 0.7 일때 여성의 몸매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사모트라케의 니케
'사모트라케의 니케'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되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니케는 두팔이 떨어지고 목도 달아났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리스의 니케는 승리의 여신이다.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반가운 전령 역할이 여신의 임무다. 니케는 또 로마시대에 빅토리아, 기독교시대에는 날개 달린 천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푸른 하늘을 헤집으며 들썩이는 날갯짓이 차마 대리석으로 빚은 조형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니케는 마침 뱃머리에 내려섰다. 앞발은 사뿐히 안착했지만, 뒷발은 아직 닿지 않았다. 파도를 어르며 위 아래로 요동치는 뱃머리에 이처럼 날아와 착지하면서 몸의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깻죽지에 붙은 두 날개가 기우뚱하다. 만약에 정확한 좌우 대칭을 이루었다면 되레 생동감이 덜했을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가 서른 일곱살때 그린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의 집중을 나타낸 것이다.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그림에서는 세 형제가 한 동아리가 되어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팔을 들어 엄숙하게 선서하고 있다.

다비드는 1782년 정부로부터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의뢰 받고 작품에 대한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을 알바 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중 하나는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와 약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 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감옥에 있는 동안 다비드는 호메로스를 그리면서 장차 이를 주제로 한 역사화를 그리기로 결심했지만 그런 생각을 접고 1799년까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풀루타르크가 전한 것이다. 로물루스가 인구 증가를 위해 로마인을 이끌고 이웃나라를 침략해 사비니 여인들을 유괴하고 강탈한 사건 있었다. 그림의 장면은 여인들이 강탈되어간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이 타티우스의 주도하에 반격에 나서 대치하는 순간이다. 당시에는 두 리더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투의 관례였으므로 화면 중앙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화면 중앙의 헤르실리아가 오른쪽 로물루스와 왼쪽의 아버지 타티우스 사이에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이는 여인들이 평화를 정착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채 621x979cm, 1805~6)
다비드는 의식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그가 처음 의도한 것은 나폴레옹이 조제핀의 관을 자신의 머리위로 높이 들어 올리고 검을 쥔 왼팔은 자신의 가슴부위에까지 올리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교황으로부터 검을 받아 들고 자신의 위로 올리는 것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강조하려는 다비드의 아이디어였다. 레라르는 그런 제스처는 기품이 없고 웃긴다면서 다른 포즈로 그릴 것을 충고했다. 또한 다비드는 교황이 손을 무릎에 얹고 앉은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반대하면서 먼길을 와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세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교황이 한손을 들어 축복하는 제스처로 그리라고 명했다. 교황은 꼭두각시로 대관식에 동원되었지만 그림에서라도 가톨릭을 대표해 황제의 등극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를 원한 것이다. 결국 다비드는 먼저 관을 쓴 나폴레옹이 검을 왼쪽 허리에 차고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 주기 위해 두 손으로 관을 높이 든 모습으로 그리고, 교황은 손을 들어 축복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대관식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으며 거의 70명 가량의 얼굴이 실제와 같아 사전에 드로잉을 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이 다비드의 작업장으로 와서 모델이 되어 주었고 대관식 때 입었던 의상을 보내줘 다비드로 하여금 정확한 실제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했다.

▶ “오달리스크”  앵그르 (캔버스 유채, 1814)  
오달리스크의 나른한 포즈는 르네상스적이기 보다 마니에리즘에 가깝다.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머리가 작고 비정상적으로 등이 긴 이 인물을 비판했다. 한 비평가는 그녀의 척추뼈 수가 너무 많다고 비난했지만, 앵그르는 그녀의 관능적인 우아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의 늘린 것이다. 빛나는 피부결과 윤곽선이 분명한 단순한 형태에서 앵그르 회화의 진수를 보여 준다.


▶”가나안의 혼인잔치” 파울로 베로네제
베로네제의 그림은 위풍 있는 건축을 무대로 하여 벌어진 성대한 잔치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서가 전하는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그림에서처럼 베로네제 당대의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되었다. 햇빛을 받은 좌측 건물의 원주는 은은한 붉은 색을 띤 베로나 출토의 대리석으로, 이탈리아 에서는 지역에 따라 지역에 따라 녹색, 백색, 주홍색 등의 다채로운 대리석이 출토되고 있다. 마치 극장의 무대와 같이 설정된 건축가들은 밸러스트레이드(화병 장식의 난간)로 좌우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밸러스트레이드 아래의 좌우 건축은 도리아식 주두로, 상부의 건축은 코린트식 주두로,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잔칫상과 그 주인공들은 밸러스트레이드 아래에 조성된 작은 광장에 배치되었다. 그 위에는 하인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양쪽 계단을 통해 술과 음식을 날라 오고 있다. 잔칫상은 가로로 길게, 또 좌우가 서로 마주보게 놓여 대칭으로 차려져 있는데, 바로 그 중앙에 그리스도와 성모가 앉아 있다. 그 외 사람들은 베로네제 당대의 이탈리아 귀족이거나, 혹은 이국적인 의상의 동방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모두가 황금색, 진홍색, 녹색, 푸른색의 번쩍거리며 바스락거리는 실크 의상을 입고, 잔치에 나온 음식과 포도주를 맛보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만찬 식탁은 호사스러운 은 식기와 유리잔으로 가득 차 있고, 또 화면 곳곳에서 금과 유리로 된 술병을 볼 수 있다. 화면 오른 쪽에 한 하인이 이제 막 술독을 들고 와 금으로 된 술병에 붓고 있다. 그 뒤로 한 사내가 서서 술잔의 술을 맛본 후 술맛에 감복한 듯 술잔을 바라본다.
이 잔치의 두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바로 화면 왼편, 가장 앞쪽에 앉아 있다. 실제로 베로네제는 이 그림에서 성서적 문맥을 이용한 만찬 축제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이탈리아와 관계된 실존 인물들의 모습을 한데 모아 놓음으로서 한편의 정치적 사교장의 모습을 재현해 낸 셈이다.


▶메두사 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캔버스에 유채, 491x716cm, 1819
1812년의 작품은 전시 후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1814년에는 메달까지 수상하게 되는데, 짝을 이룬 두 작품은 나폴레옹 제정의 승리와 역경들에 대한 역사적 우의화로 읽힐 수 있다. 1819년에는 1년 가깝게 이탈리아에 머문 뒤 <메두사 호의 뗏목>을 (검열을 거친 후에) <난파장면>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살롱전에 출품한다
프랑스의 배 메디즈호는 1816년 7월 망명 귀족 출신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왕실 해군 소속의 메두사 호가 400여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식민지인 세네갈을 향하던 중 세네갈 해상 블랑 곶 먼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난파되었다. 하지만 구명 보트는 250명만 태울 수 있었고 하급선원 150명은 뗏목을 만들어 12일 동안 표류하게 되었다. 이들이 구조되었을 때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최종적으로 기적적인 생존을 한 사람은 150명중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파도에 휩쓸려 죽었고, 살아남은 자는 심한 기아로 시체를 뜯어 먹어야만 했다. 이 난파사건이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왕실의 연줄로 선장이 된 무자격 선장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프랑스 국민은 분노했다. 더욱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은 악천후, 굶주림, 목마름, 병마는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2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일을 글로 썼고, 제리코는 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메두사 호의 뗏목>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처음 생각은 불안과 공포로 거의 광란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항거 모습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제리코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영웅적이고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혁명) 들라크르와 (캔버스에 유채, 260x325cm, 1831)
1830년의 작품인데, 이 해의 7월 28일에 7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3일간 계속되고, 8월 3일에는 필립이 왕위에 즉위했다. 이 동란으로, 자유에 대한 국민의 여망은 확대되었다. 오늘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거의 프랑스 공화국의 표상이 되어버린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샤를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파리 민중의 항거와 루이 필리프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국민 전체의 대화합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 '7월 28일'이라는 머릿 제목을 지니 대작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샤를 10세의 전제적인 법령의 포고에 대한 반발로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기간 가운데 하루이다. "여기서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현대적 주체, 즉 하나의바리케이드입니다."라고 1830년 10월 18일 들라크루아는 형 샤를 앙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 는 있을 것입니다." 들라크루아가 친구 펠릭스 기이마르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림이 12월 6일경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작품은 몇 달만에 완성된 듯하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의도를 얼마간 지닌 채 들라크루아는 1831년 이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할 것을 결심한다.


▶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 들라크루아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왕은 적군에 포위되어 2년 동안 이나 궁전에 갇혀 살았다. 적들이 사치스러운 궁전에 난입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왕은 오른팔을 베고 누워 기대어 누운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는 육감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 당하는 광란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코끼리 머리로 장식된 왕의 침대의 덮개는 피에 젖은 듯 온통 붉은 색이다. 방바닥에는 온작 보석들이 무질서 하게 흩어져 있고 흑인 하인들은 곱게 단장한 백마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들라크루아는 오른쪽 밑에서부터 왼쪽 위로 넓게 펼쳐지는 대각선의 공간에 사랑과 격정과 죽음의 고통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형식미와 티치아노, 카라바조, 루벤스에게서 배운 강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 흥분을 줌과 동시에 심리적 자극을 일으켜 드라마틱한 효과를 낸다. 우울한 사색에 잠긴 채 모든 종말을 지켜보는 왕 앞에서 왕의 침대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여인의 매끈한 피부, 하인에게 잡혀 찔려죽는 순간에 보여지는 뒤틀리고 휘어진 여인의 풍만함과 곡선미는 로맨티시즘의 극치를 이룬다.

▶ 모나리자 77cm*55cm 루브르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탈리아에서는 이 그림을 <라 조콘다>라고 부른다. 모나는 마돈나, 리자는 엘리자벳을 줄인 말이다. 리자는 1479년 피렌체 남쪽 시골에서 태어나 열 여섯 나이로 열아홉 연상의 홀아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한다. 이때부터 조콘다라는 이름을 얻었다. 1506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그림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스프마토법 이라는 외곽선 흐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입이나 눈의 윤곽이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화가들이 분명한 그림을 그리려고 발버둥칠 때 그는 반대로 뿌연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빈치는 다름 아닌 인간의 정신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다빈치를 기점으로 미술은 인간의 외면에서 내면의 세계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어쩌면 또 다시 중세로 돌아가려는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당시의 유럽은 경제적으로 호황기였다. 특히 피렌체는 모든 도시중에서도 최고의 부자 도시였고, '절대군주와 같은 권력을 휘둘렀던 '메디치'가문은 피렌체의 '은행가'였다.
사람들은 사치와 쾌락에 물들어 갔으며 물질만능주의 적인 정신이 팽배해 있었다. 의식있는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정신의 대표작이 바로 모나리자이었다. 이 그림은 외곽선이 공기에 어떻게 깊이를 주고 색과 색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며, 토운이 서로에게 어떤 속삭임을 하는가 보여진다. 그래서 공간과 공기와 자연과 인물이 하나의 혼연일체가 되어 숭고한 신성을 표현하고 있다. 다빈치는 인간과 자연과 그 모든 것 속에서 외양에 나타난 것보다 엄청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내면 속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다르지 않고, 자연 속에서도 신성을 보았던 것이다.

화가는 거의 정삼각형의 구도로 인물을 집어넣으므로 절대적 안정의 구도와, '사자의 질서'를 실현하고 있으며, 뒷부분의 관념적인 풍경으로서 중앙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엄격한 구도 속에서 작은 자연스러움을 발견한다. 그 배경 화면은 의복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게 되어서 인간과 자연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만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동일성의 장에서 만나고 있다. 다빈치가 바라보는 세계는 당시의 화가들처럼 가볍고 밝은 것이 아니었다. 다빈치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진실은 깊이와 무게를 지닌 세계였다.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를 주는 것이며, 토운과 색상에 깊이를 주고,인간 영혼의 감당할 수 없는 숭고한 무게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통하여 '현실과 이데아' '신과 인간' '로고스와 파토스'의 이분법적인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외곽선은 선 원근법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공기나 배경에 공간적인 깊이를 주려는 시도였다.

▶ 동정녀 마리아의 임종, 카라밧지오 1605∼06년, 캔버스에 유채, 369 x 245cm
1601년 6월 4일 주문을 받아 5년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이 작품은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에 장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기작가들의 말에 의하면 "관례적인 예절"의 부족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한다. (1607년 봄)이 그림은 곧 만토바 공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젊은 루벤스가 그를 위해 사들였던 것이다. 루벤스는 만토바 추기경이 천거하여 몬탈로 추기경의 후원을 받아 1601년 여름부터 로마에 와 있었다. 그가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 왔을 때는 24세였다. 붉은 휘장이 화폭의 삼분의 일을 가리고 어둠에 반쯤 숨겨진 인물들이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졌다. 희끄무레한 빛줄기가 마리아의 얼굴과 손등을 쓰다듬고 지나가는데 그녀는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르게 눈을 감고 있다. 고개는 약간 기울어져 있다.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열 명의 조객들이 조용히 속삭이며 수군거리고 애도를 표하며 눈물을 닦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다. 마리아의 얼굴이 가장 또렷하게 묘사되었는데 그녀의 얼굴과 손발은 검푸른 끼가 차갑게 감돈다. 근경에는 구릿빛 대야가 놓여 있고 그 위에 한 조각 흰 천이 걸쳐 있다. 살아 있는 눈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람의 눈들은 어둠에 가려졌거나 고개를 숙여서 보이지 않거나 손으로 눈을 가렸거나 마리아처럼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살아서 바라보는 눈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 장님처럼 되었다. 붉은 색은 오직 마리아의 휘장만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 밖에는 짙은 다갈색 (정확히 말하면 어둠이 있는 다갈색)과 군청색(역시 어둠 속에 있는) 이 대부분이고 흰색천이 근경에 약간 있을 뿐이다. 널찍한 휘장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늘어진 두 줄기의 끈이 바람에 흔들리며 X 자를 긋고 있다.

▶ 어두운 동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 1483년-1486년 유화 199*122cm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시중을 하고 있으며 천사는 손을 들어서 한 아기를 가리켜 보인다. 아기 세례자 요한이다. 예수보다 반년 먼저 태어나 훗날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작품이다. 당초 작성된 계약서에는 성모자와 천사, 예언자 둘을 그려 넣기로 되어 있었으나 예언자를 빼고 대신 아기 요한이 들어갔다. 뒤에 보이는 배경이 어둡고 괴기하다. 깍아지른 벼랑과 기암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마리아는 손을 내밀어 아기 요한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요한을 발견한 아기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들고 다른 손가락을 접어서 들어 올리는 자세는 축복을 의미한다.. 아기 예수가 축복을 하고 아기 요한은 두 손을 마주 대고 무릎을 꿇는다.


▶ 엠마오의 순례자들 렘브란트 반 린[Rembrandt van Rijn] 1648년 회화 / 패널에 유채 68 x 65 cm
여러 사람들 손을 거쳐 1777년 파리에서 구입된 이후 대혁명 당시 프랑스 국가 소유로 귀속된 이 작품은 르네상스 이후 많이 다루어진 주제인 "엠마오의 순례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부활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모습을 나타내신 곳이 엠마오 였다. 이 주제는 렘브란트 외에 베르네세, 티치아노, 카라바죠등 많은 화가들이 즐겨 다루었고 19세기 들어 들라크로와 등도 묘사했다. 신교도였던 그는 작품에서 전통적인 성화의 도상학에 의존하지 않고 독창적인 모험을 통해 초 자연적인 기적의 순간을 향해 바로 다가선다. 실내는 낡고 오래된 건물임을 일러줄 뿐 아무런 장식도 특징도 없다. 예수 역시 초췌하고 창백하며 야윈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부활의 기적이나 사망을 이긴 영광을 상징하는 어떤 상징도 갖고 있지 않다. 예수의 머리 뒤로 빛나는 광채만이 유일하게 초자연적인 진실을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그 빛은 왼쪽에서 들어오는 조명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고 수수하기만 하다. 제자들 역시 기적을 본 사람들 같지 않게 아직은 덤덤한 모습이다. 그림의 모든 것은 침묵과 박명의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년-1675년) 레이스 짜는 여인 1664년 캔버스에 유채 24*21
1696년 처음으로 시장에 나와 판매된 이후 1870년에 루부르 박물관이 7,270프랑에 구입하게 된다.
작은 크기의 이 그림은 많은 철학자, 시인, 작가들을 감동시킨 작품이다. 르느와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이라고 감탄을 했고 살바도르 달리는 모사를 부탁한 한 미국인에게 초현실적으로 해석한 자신의 작품을 그려 주기도 했다. 그림은 단순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한 여인이 정신을 집중해 가며 레이스를 뜨고 있다. 전경에는 양탄자와 흰 실과 붉은 실이 놓여 있다. 하지만 마치 카메라의 렌즈가 가까이 있는 사물과 멀리 있는 사물을 한 화면속에 찍을때처럼 양탄자는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진 않고 여인의 얼굴과 두손이 가장 명료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햇빛을 받은 여인의 노란색 옷은 어두운 녹색의 양탄자와 겹쳐지면서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 일상의 작은 일에 열중하고 있는 여인은 마치 영원히 정지된 어느 한곳에 못박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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